김소월 시선집(1987 중판본) - 소월의 명시
素月의 名詩
김소월 / 한림출판사
□김소월의 시와 생애
오늘날 소월의 이름은 많은 한국인의 가슴 속에 구원의 연인처럼 새겨지고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던 해가 1945년, 이미 30여년이 지났는 데에도 그의 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되어 있고, 자꾸 더 많은 독자층을 형성해 가고 있다.
남녀노유를 불문하고 이처럼 소월의 시가 널리 읽혀지고 있다는 사실은 짧은 우리 문화의 터전에서 바라볼 때 여러 큰 자랑이요 보람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소월 일개인의 천재적인 재능뿐만이 아니라, 소월은 곧 우리에게 유일의 민족시인이며, 민족 정서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소월의 시가 세상에 처음 발표된 것은 1920년 3월 「창조」지 제 5호에서부터였다.
당시 오산학교에 재학중이었던 소월은 그의 스승 김안서의 영향을 받아 민요적인 율조의 시풍을 터득하고 있었다.
「창조」지에 발표된 5편의 시는 <浪人의 봄>, <夜의 雨滴>, <午過의 泣>, <그리워>, <春崗> 등으로서, 우리의 전통적인 서정과 율조를 보여주었다.
계속하여 소월은 「개벽」, 「삼천리」, 「靈臺」 등 잡지에 많은 시를 발표했는데 특히 「개벽」지에는 11회에 걸쳐 도합 53편의 시가 실려졌다.
당시(1920년대)는 우리 문단에 민족주의와 아울러 프로문학이 대두된 시기이기도 했다.
시에서도 「白潮」 동인들을 위시한 낭만시와 상징주의적인 요소가 시단의 주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소월은 별로 이들 시단의 흐름에는 관계 없이 그 스스로의 개성으로 「鄕歌」와 「麗謠」에서 면면히 이어오는 우리 고유의 정서와 율조를 그의 시에 담고 있었던 것이다.
시단은 당시 소월의 이러한 시풍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고, 뚜렷하게 논의한 적도 없었다.
오직 月灘만이 詩壇評(1923년 「開闢」誌 1월호)에서 소월의 시를,
「......그것은 서정적 아름다운 말과 리듬으로 짜내여졌다. ...아아 우리의 시속엔 얼마나 아름다운 기교가 있으며, 얼마나 아름다운 조율이 흐르며, 얼마나 아름다운 정서가 솟는가. 무색한 우리 시단에 이러한 작품이 있음을 기뻐하여 마지아니 한다......」고 칭찬했다.
그리고 또,
「소월은 우리 민족의 혈관 속에 흐르는 조용한 인정과 꿈과 눈물과 순정을 남김없이 가지고 있는 시인이었다. 그러므로 소월이 저 세상으로 떠나간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의 시는 오히려 우리의 가슴을 파고드는 아름다운 서정과 낭만으로 우리에게 소월이란 인간과 호흡을 통하게 해주는 것이다.」 라고 쓰기도 했다.
아무튼 소월은 그의 인생과 시에 똑같이 외롭고 불행한 사람이었다.
다른 시인들이 서구적인 사고와 그의 모방에만 급급해 있었을 때, 소월은 유독 향토색이 짙은 자연과 한, 소박하고 조촐한 서정을 고집하며, 꾸준히 그의 재능을 발전시켜 온 것이다.
나이 어린 시절부터 그 뛰어난 시재를 번뜩이며, 소월은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따뜻한 인정과 눈물을, 사랑과 낭만을, 남김없이 심어준 시인이었다.
그가 살다 간 33세의 짧은 생애는 그 고독과 그 불행함에 있어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려주고 있다.
고향을 떠나 서울의 배재고보에 다닐 무렵 그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우수한 시편들을 썼다. 그의 나이 19, 20세 때이다.
당신의 편지를
받은 그날로
서러운 풍설이 돌았습니다.
물에 던져 달라 하신 그 뜻은
언제나 꿈꾸며 생각하라는
그 말씀인 줄 압니다.
흘려 쓰신 글씨나마
언문 글자로
눈물이라 적어 보내셨지요.
물에 던져 달라 하신 그 뜻은
뜨거운 눈물 방울방울 흘리며
맘 곱게 읽어 달라는 말씀이지요.
- 고적한 날_
그의 첫 시집 <진달래꽃>에서 얼마든지 발견될 수 있는 이 섬세한 정조와 감상은 그의 눈물 많은 생활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
그의 생활이 <눈물>이었다는 것은 그가 곧 그의 생애를 얼나마 많은 실패와 좌절, 그리고 절망과 실의 속에 보냈다는 사실로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그의 스승이었던 김안서도 <소월의 추억>이라는 글 속에서,
「그리고 소월의 시에 나타나는 원망스러운 한과 고독은 역시 소월이 그 자신의 성격이외다. 가끔 가다가 자폭이라 할 만한 것이 있는 것도 또한 소월이의 생활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일면이외다. 불우한 속에서 뜻을 얻지 못하였는지라 이 시인의 심독한 성격은 원망스럽게도 그것을 단념해 버린 것이외다. 事爲에는 敗를 보고 생활이 안정을 잃게 되니 그의 고독은 컸던 것이외다. 그리고 북바쳐오르는 울분에 가끔 소월은 총명한 理智의 판단을 잃어버렸던 것이외다. - 중략
여하간 이 시인의 짧은 33세의 일생은 대단히 불행하였습니다. 불행하였는지라 이 시인에게 대한 우리의 愛惜은 그 끝을 모르는 바외다. 그리고 언제든지 소월이 생사에 대하여 이야기하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요절은 楮多病의 그것이라기l보다도 요절을 의미하는 무슨 전조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아니하외다.」
하고 설명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생애가 얼마나 비참하였는가를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소월은 영원히 살아 있는 시인이다.
우리 민족이 살아 있고, 우리의 자연이 살아 있고, 우리의 정서가 살아 있는 한, 소월의 아름다운 노래들도 강물처럼 끝없이 흘러가리라.
□저자/김소월
1903년 평북 정주군 곽산면 남서리에서 김성도의 아들로 출생.
1921년 정주 오산중학교 졸업. 은사 김안서선생에게서 민요풍의 시를 배움.
1923년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 그후 일본상과대학 2년 중퇴, 평북 구성군 남시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경영함.
1925년 시집 <진달래> 출간
1935년 요절.
素月의 名詩
값2,800원
1984년 10월 5일 인쇄
1984년 11월 5일 발행
저 자 : 김 소 월
발행자 : 임 인 수
발행처 : 한림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