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소개
가론강을 건널 때내가 너무 많이 흐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누가 나를 여기에 떨구고 간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_「가론강을 건널 때」 부분매일 저녁 지는 해를 바라보기 위해우리 동네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는어떤 남학생을 아주 잠시지만좋아했던 적이 있다. _「유리 닦기」 부분아직 더 닳아질 마음이 남아 있구나갈 만큼 갔다고 생각했는데 _「내 낡은 구두에게 바치는 시」 부분198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1987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한 염명순 시인의 첫 시집 『꿈을 불어로 꾼 날은 슬프다』를 문학동네포에지 13번으로 새롭게 복간한다. 1995년 가을 문학동네 시집 9번으로 첫 시집을 묶고 26년 만이다. 총 61편의 시를 4부에 나누어 실었다. 염명순 시인은 이 시집이 출간된 1995년에 한국을 떠나 프랑스 파리에서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가도 닿지 못하는 집을 향한 쓸쓸한 향수, 잠든 도시의 창을 열고 불 밝힌 다른 집 창을 찾는 그리움은 타지에서 그를 살아 있게 하는 감각이었을까(「바다」 「심학규 4」). 그렇게 조심했지만 끝내 나를 버린 도시에서(「조난기」) 누가 어디서 나 대신 내 삶을 살고 나는 여기서 남의 삶을 연기하고 있다는 느낌(「어떤 하루」). "여행객처럼 삶을 스쳐지나가지도, 정주민처럼 영원히 눌러앉지도 못하는”(이경호) 시인이 머무는 여기는 살아갈수록 첩첩한 불명(不明)의 땅(「심학규 1」). 갈무리할 추억조차 없는 사람들은 외투를 두껍게 껴입고도 춥다(「겨울 이야기」). 불안하게 흔들리는 시선이지만 언어의 적외선으로 찍어낸 듯 선명한 풍경 그 속에는, 삶의 고단함을 꿰뚫고 지나가는 심미적 자의식이 번득이고 있다(남진우).문학동네포에지로 시집을 복간하며 초판에 수록하지 않은 시 「꽃다지」를 맨 뒤에 새롭게 넣었다. 「꽃다지」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기 이전 염명순 시인이 『실천문학』으로 등단하기를 바라고 투고한 시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1985년 『실천문학』이 ‘민중교육’ 사건으로 폐간되면서 시인은 198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먼저 등단하게 된다. 이어 1987년 『실천문학』이 무크지로 환원되며 이전에 투고한 시들이 게재되어 재등단을 하게 된 사연이 있다. 이 시집에서 시인이 가장 오래전에 쓴 시는 "사랑은 상수리나무 몇 그루의 흔들림으로 시작되어/새 깃털에 묻은 잿빛의 무게만큼/깊어지는 것인지” 물었던 이십대 초반에 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이다. 두번째가 바로 "그리워도 뒤돌아보지 말자/눈물 삼키며 떠나던 내 고향 언덕길에 핀 꽃다지” 하고 노래하는 이 「꽃다지」이다. 염명순 시인의 시들은 적요한 순간 문득 들켜버리고 마는, ‘열어 보이기엔 너무 연한 상처의 속살’(「꽃게」)이자 ‘강 저편에서 쓰는 저물지 않는 사랑의 편지’(「가론강을 건널 때」)이다. "꿈을 불어로 꾼 날은 슬프다/다시는 시를 못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아픈 꿈의 머리맡에서 누가 이마를 짚어주는 듯했는데/밥 많이 먹으라는 언니의/안부 전화가 걸려왔다.”(「꿈」) 그 저물던 여름, 우리 가족은 아직 거기서 반짝이고 있을까(「가족사진」). 누가 내 이름을 부른다부를 때마다 뒤돌아보고픈그리운 사람은 어둔 하늘에서불꽃으로 흩어지고그해 칠월 큰물 들어차오르던 남한강변에 자주마른 갈대처럼 쓰러지시던 어머니장마철 습기는 끈끈하게 감겨들고언니가 쓰다 만 그림물감과 화구통 위에불은 잘 붙어주지 않았다거짓말 같게도 언니는 왜스케치북 맨 첫장에열아홉 자화상을 그리고 떠난 걸까거울을 앞에 놓고 낯선 죽음을 보듯섬뜩섬뜩해지는불꽃은 드디어 탁탁 소리를 내며 타오르고처녀귀신이 무섭다고 일찍 빗장을 잠근마을길, 밤하늘 위로흰 옷자락 흔들며초혼의 넋 거두어가는 소리로불꽃은 멍울멍울 터지며사그라들고_「불꽃」 전문
■ 목차
시인의 말 개정판 시인의 말1부 물푸레나무가 때죽나무에게 / 아침 노래 / 수국이 피는 곳 / 겨울 이야기 / 가족사진 / 봄날엔 / 비 그친 뒤 / 고양이 / 불꽃 / 꽃게 / 작은 새 / 저 햇살은 / 눈사태 2부 비눗방울 / 김장 1 / 김장 2 / 김장 3 / 춘화도 1 / 춘화도 2 / 한국 근대 여성사 / 널뛰기 / 지하철은 달린다 / 사랑의 자세 / 조난기 / 부처와의 대화 / 돼지의 해탈 / 위독하신 어머니 / 심학규 1 / 심학규 2 / 심학규 3 / 심학규 4 / 심학규 53부 낯선 곳에서 / 국경을 넘으며 / 나무처럼 / 바다 / 프랑스대혁명 200주년 축일에 / 카페 아르뷔스트 / 파리의 우울 / 가론강을 건널 때 / 체르노빌 / 유리 닦기 / 가을 /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 어떤 하루 / 세한도 / 황하 / 꿈 4부 저물녘 /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 노래에 대하여 / 비가 내리는 몇 가지 풍경 / 감기 / 우기 / 마지막 가을 / 밤의 산책 / 내 낡은 구두에게 바치는 시 / 달빛 / 입관식 / 첫눈 / 꽃다지
■ 출판사서평
문학동네포에지를 시작하며"어떤 시집이 빠져 있는 한, 우리의 시는 충분해질 수 없다.”-문학동네 복간 시집 시리즈 문학동네포에지를 시작하며1.2020년 11월 문학동네는 복간 시집 시리즈인 문학동네포에지를 시작하며 1차분 열 권을 우선으로 선보였습니다. 2021년 3월 2차분 열 권을 새롭게 세상에 내놓습니다. 문학동네는 일찌감치 이 작업을 시도한 바 있습니다. 1996년 11월 ‘포에지 2000’ 시리즈의 펴냄 아래 황동규, 마종기, 강은교의 청년기 시집들을 복간하며 그 명맥을 이어나가던 바 있습니다. "예민한 감성과 날카로운 직관으로 시대의 혼돈과 상처를 노래했던 젊은 영혼의 생생한 울림이 담긴 추억의 명시들을 독자 앞에 다시금 제시함으로써 빛나는 시의 정수를 확인하고자” 하려 함이라는 취지의 글이 떠오릅니다. 그 정신은 온전히 두고 그 매무새를 새로이 다지는 과정 가운데 문학동네포에지의 첫 행보를 내딛기까지 시간이 오래 좀 더디 걸린 것도 사실입니다. "옛 시집을 복간하는 일은 한국 시문학사의 역동성이 현시되는 장을 여는 일이 되기도 할 것”이다, 우리 스스로 선언한 책임과 의무의 말이 실은 얼마나 큰 무게인지 모르지 않은 까닭입니다. 시라는 무한과 시집이라는 열림을 끌어안으려는 데 있어 한껏 오므라들었다 힘껏 펼칠 줄 아는 시리즈라는 줄자, 이를 가능케 하는 힘은 아무려나 사랑에 있음을 이제는 깨닫고 온전히 그 순정에 기대어 용기를 낼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2.문학동네의 구간 시집 시리즈인 문학동네포에지는 복간의 기저를 비단 문학동네에 적을 두었던 시집만을 필두로 하지 않는다는 점을 특징으로 합니다. 반드시는 아니더라도 이왕이면 읽어둬도 참 좋으련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오랜 시간 서점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시집들이 우리에게는 꽤 있었습니다. 문학동네포에지는 시간을 거슬러 찬찬히 행하는 시로의 이 뒤로 걷기를 통해 파묻혀 있을 수밖에 없었던 시집을 발굴하고, 숨어 있기 좋았던 시집을 골라내며, 책장 밖으로 떨어져 있던 시집을 집어 서가에 다시 꽂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음으로써 한국 시사를 관통함에 있어 필요충분조건이 되는 시의 독본들을 여러분들에게 친절히 제공해드릴 참입니다. 출발의 본거지는 제각각 달랐으나 도착의 안식처는 모두 한데로, 문학동네포에지 안에서 유연성 다해 섞이고 개연성 있게 엮인 가운데 한 차에 열 권씩 펼쳐질 시의 병풍은 저마다 다양한 개성으로 저마다 독특한 양식으로 저마다 특별한 사유로 시리즈라는 줄자에서 보다 큼지막한 테두리로 우리를 시라는 리듬 속에 재미 속에 미침 속에 한껏 춤추게 할 것입니다. 특히나 귀하디귀하다 싶은 것이 시인들의 첫 시집임을 알아 그 최전방에 첫 시집들을 앞서 배치한 것인데 1차분의 김언희, 김사인, 이수명, 성석제, 성미정, 함민복, 진수미, 박정대, 유형진, 박상수 시인에 이어 새롭게 출간된 2차분 역시 김옥영, 이문재, 염명순, 안도현, 정은숙, 조연호, 김민정, 최갑수, 이영주, 이현승 시인의 첫 시집임에, 복간에 있어 첫 시집을 앞서 염두에 둔다는 원칙 역시 말씀드리는 바입니다.3.문학동네포에지는 문학동네시인선과 책 사이즈가 같습니다. 세상의 시계와는 완연히 다른 시의 시간 속에 이 두 시리즈가 맘껏 뒤섞이는 난장 속에 시집 시리즈의 건강함을 기대하였고, 맘껏 뒤섞이는 자연 속에 시집 시리즈의 무구함을 기약한 것도 애초의 기획 의도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표지 디자인의 중심을 컬러에 놓은 것도 둘의 공통점입니다. 문학동네시인선이 핀 꽃이거나 필 꽃이라 할 때 문학동네포에지는 꽃이 있다 떨어진 꽃자리이거나 꽃 없이 진 꽃을 기억하는 등산로 앞 의자라 할 적에 그 컬러의 생겨먹음이 필시 달라야 할 것이라는 짐작이 내내 따라붙었습니다. 힘을 빼고 또 뺐습니다. 등을 펴고 또 폈습니다. 그렇게 비우고 그렇게 꼿꼿해지는 과정 속에 문학동네포에지는 파스텔톤의 열 가지 컬러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해설이 따로 실리지 않는 시집 시리즈, 추천사도 따로 박히지 않는 시집 시리즈, 시인의 약력과 시인의 자서와 시인의 시로만 꿰는 시집 시리즈, 시인의 시 가운데 미리 보기로 어떠한가 싶어 고른 한 편의 시를 책 뒷면에 새기는 일로 시집의 단장을 마치고 시집의 장단을 맞춘 시집 시리즈, 이에는 색보다는 물의 수위가 높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한 차에 열 권씩 출간하려는 작정은 예의 과정에서 비롯한 작정이기도 합니다. 4.구석구석 모자람도 클 것입니다. 걸음마에 넘어짐은 자석 근처의 철심 같은 것, 하여 많은 분들이 넘어질 적마다 넘어졌구나 가리키시고 가르쳐주셔야 오랫동안 지치지 않고 씩씩하게 걸어나갈 수 있음을 압니다. 모쪼록 새롭게 시작하는 문학동네포에지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사랑으로 지켜봐주시면 여한이 없을 성싶습니다. "사랑이란 죽은 이도 거의 소생시킬 수 있는 것”이란 에밀리 디킨슨의 시에 힘입어 "사랑이란 죽은 시집도 거의 소생시킬 수 있는 것”이란 우리만의 변주로 그이가 부추긴 ‘사랑의 함대’를 비유 삼아 오늘 이렇게 문학동네포에지라는 배를 물위에 띄워보는 바입니다.■ 기획의 말그리운 마음일 때 ‘I Miss You’라고 하는 것은 ‘내게서 당신이 빠져 있기(miss) 때문에 나는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뜻이라는 게 소설가 쓰시마 유코의 아름다운 해석이다. 현재의 세계에는 틀림없이 결여가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그리워한다. 한때 우리를 벅차게 했으나 이제는 읽을 수 없게 된 옛날의 시집을 되살리는 작업 또한 그 그리움의 일이다. 어떤 시집이 빠져 있는 한, 우리의 시는 충분해질 수 없다.더 나아가 옛 시집을 복간하는 일은 한국 시문학사의 역동성이 드러나는 장을 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하나의 새로운 예술작품이 창조될 때 일어나는 일은 과거에 있었던 모든 예술작품에도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 시인 엘리엇의 오래된 말이다. 과거가 이룩해놓은 질서는 현재의 성취에 영향받아 다시 배치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빛에 의지해 어떤 과거를 선택할 것인가. 그렇게 시사(詩史)는 되돌아보며 전진한다.이 일들을 문학동네는 이미 한 적이 있다. 1996년 11월 황동규, 마종기, 강은교의 청년기 시집들을 복간하며 ‘포에지 2000’ 시리즈가 시작됐다. "생이 덧없고 힘겨울 때 이따금 가슴으로 암송했던 시들, 이미 절판되어 오래된 명성으로만 만날 수 있었던 시들, 동시대를 대표하는 시인들의 젊은 날의 아름다운 연가(戀歌)가 여기 되살아납니다.” 당시로서는 드물고 귀했던 그 일을 우리는 이제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문학동네포에지 2차분 리스트011 김옥영 『어둠에 갇힌 불빛은 뜨겁다』012 이문재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013 염명순 『꿈을 불어로 꾼 날은 슬프다』014 안도현 『서울로 가는 전봉준』015 정은숙 『비밀을 사랑한 이유』016 조연호 『죽음에 이르는 계절』017 김민정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018 최갑수 『단 한 번의 사랑』019 이영주 『108번째 사내』020 이현승 『아이스크림과 늑대』
■ 저자소개
저자 : 염명순대학에서 불문학을, 파리 1대학에서 미술사학을 공부한 뒤 미술에 관한 책을 쓰고 좋은 프랑스 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다. 쓴 책으로 《태양을 훔친 화가 빈센트 반 고흐》 《마르지 않는 창작의 샘 피카소》 들이 있고, 옮긴 책으로 《곰의 노래》를 비롯한 아기곰 시리즈(5권)와 《나무들도 웁니다》 《쉬피옹과 멋진 친구들》 들이 있다.